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M26 퍼싱 (문단 편집) ==== 개발 과정에서의 논쟁 ==== 1943년 5월 24일 일단 T26의 생산은 승인되었지만 정작 군부는 회의적이었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 또한 신형 90mm 주포의 중요성을 절감하지 못했고, 그들의 눈에는 이 돼지같은 전차는 셔먼처럼 재빠른 진지돌파와 속전속결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애초에 1,500여대의 T26 중전차의 생산이 승인되었지만, 군부는 생산되더라도 500여대 이하만 보유하기를 원했다. 그게 아니라면 가벼운 T25 전차에 76mm 포를 달아 중(中)전차화 하여 7,000여대 정도 생산하는 것을 반겼다. 무엇보다도 군부는 T26의 생산으로 인한 M4 셔먼의 생산의 차질은 원하지 않았다. 1943년 9월 13일 여러가지가 개량된 T26E1 전차 10대가량 생산되었고, 육군 병기부는 T26E1 전차를 추가적으로 500여대 정도 생산할 것을 계획하였지만, AGF의 [[레슬리 맥네어]] 장군의 극렬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바다 건너 병기를 조달해야 하는 입장에서 수송 체계의 한계를 시험하는 40톤급 중전차는 보급에 큰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어차피 배에 싣고 가는데 퍼싱의 40톤이나 셔먼의 30톤이나 무슨 차이냐! 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당시 전차 수송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대형 선박에 램프로 그대로 타고 올라가서 싣는 게 아니라, 일반 화물선에 크레인으로 전차를 달아 올려서 차곡차곡 싣는 방식이었다. 때문에 M4 전차를 보면 차체 전후면에 이렇게 크레인으로 줄을 묶어 달아 올리기 위한 철제 고리가 장착되어 있으며, 이는 퍼싱도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40톤급은 이런 크레인이 다룰 수 있는 무게의 한계였기 때문에 수송에 어려움이 생겼던 것. 그래서 장거리 보급으로 인한 어려움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맥네어는 전방으로부터 "전선 수요(Battle Need)"가 있는, 즉 전투병이 조우한 전투 상황에 따른 어려움을 극복하는 병기를 우선 제작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맥네어는 이 방침을 통해 전간기식의 허황된 전투 병기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낭비를 최소화할 수 있었고 1940년대 초반까지 미군 전차 승무원들이 누리던 기술적인 우위를 이끌었지만, 이후 먼저 배치된 셔먼이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상황에서는 아직 전선 수요가 없는 후속 전차의 개발에 보수적인 태도를 취했다.[* Zaloga 2008, Armored Thunderbolt p. 46–48, 120–125] 아직 티거와 판터를 조우하지 않은 대다수 미군 전차 승무원은 75mm 포만으로도 대전차와 대보병 임무를 모두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 크고 무거운 포에 대한 전선 수요가 거의 없었고, 자신이 싸우는 유럽 전장이 더 무겁고 강한 후속 전차가 쏟아져나오는 군비경쟁의 장이 될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물론 일반 전차 승무원은 군비경쟁과 같은 대전략적 판단을 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승무원들의 잘못은 아니다. 문제는 그런 대전략적 판단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던 맥네어가 일선 승무원의 호의적인 평가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 현실에 안주해버렸던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10년 후 미국은 자신이 최강국이라는 이유로 현실에 잠시 안주했다가 [[스푸트니크 쇼크]]로 소련에게 호되게 얻어맞는다. 이후 미국은 타 국의 기술적 우위를 인지하여 [[DARPA]]를 비롯한 연구 기관을 창설했고, 타 국가의 기술적인 역량을 파악하고 전 분야에서 최소 한 세대 이상 앞서는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R&D에 목숨을 건다.] 그래서 승무원들로부터 더 강력한 주포를 탑재한 전차에 대한 "전선 수요"가 발생한 시점에서 이미 많은 전차 승무원들이 희생된 지 오래였고, 이 전선 수요가 상층부에까지 전달되어 신형 전차가 개발되고 대서양을 건너 수송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Ibid.] 1943년 11월 13일, 당시 [[영국]]에 부임해있던 서부전선 사령관 제이콥 데버스는 국방성을 상대로 "강력한 티거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5대의 셔먼에 1대의 T26은 꼭 필요하다!"라고 주장했으나, 그러한 주장은 역시나 AGF의 수동적인 태도에 막혀버렸다. AGF의 생각은 이랬다. "티거는 별로 많지도 않을 것이고, 나머지 독일 전차는 셔먼으로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하다."[* 문제는 그 나머지에 '''[[5호 전차 판터|판터]]'''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 그러나 이런 생각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막된 이후로 산산히 부서졌다. 게다가 이렇게 안주한 기간은 소련기갑에 필사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독일 전차개발사에 있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신형 중전차 개발을 시작한지가 1년이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시간만 낭비된 셈이었다. [[조지 S. 패튼]] 또한 부정적이었다고 전해지나, 사실 패튼은 그런 말을 했다는 기록이 없는데다가 패튼이 안좋아한 것은 퍼싱의 기동력이지, 화력과 방어력에서는 충분한 만족을 표했다고 한다. 애초에 패튼은 떡장갑인 점보 셔먼의 강한 장갑에 만족하여 보급요청까지 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제한된 독일군 전차에 대해 선전한 [[M4 셔먼]] 전차를 과대평가하며 맹신하고 있었고, 다수의 셔먼으로 소수에 그칠 독일의 [[6호 전차 티거|티거]]와 [[5호 전차 판터|판터]]를 상대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미군은 노르망디 이후 간단히 독일군을 압도했다는 점에서 틀린 말은 아니지만, 수많은 전차와 승무원들의 쓸데없는 희생으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 시간에 무능한 장성들은 뒤에서 팔자좋게 있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nooganomics.com/120807-Wrecked-Tanks-620x414.jpg|width=100%]]}}} || || '''티거 전차에게 격파 당해 궤도가 끊어진 셔먼'''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4_burning_leipzig.jpg|width=100%]]}}} || || '''라이프치히에서 격파된 셔먼'''[* 밑에 임시로 덮인 전차병의 시신이 보인다.] || 미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후 32%의 M4 셔먼 전차를 소실했다.[* 중대원 1/3이 전사했다고 생각해보면 된다. 이 정도 손실이면 사실상 전투불능이다.] 원래 연합군은 '''7% 손실'''을 예상하고 있었다. 이렇게 낙관적인 계산을 한 이유는 그 때까지 소련군을 제외한 연합군은 독일군의 [[3호 전차]], [[4호 전차]]같은 전차만 상대했고 [[5호 전차 판터|판터]]나 [[6호 전차 티거|티거]] 같은 전차는 한 손가락으로 셀 정도밖에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북아프리카 전선의 튀니지에서 티거 중전차가 무쌍을 해도 단지 소수의 특수제작 전차가 유리한 지형과 기습을 이용한 우연의 결과라고 오판한 것이다. 실제로 미군은 북아프리카나 이탈리아 전선에서 여러차례 티거나 판터 전차를 수차례 교전한 전적이 있는데 이 때마다 당시 미군의 전력으로 큰 문제없이 격파하거나 몰아내는데에 성공한 탓에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튀니지의 엘 게타르 전투에서는 [[M3 하프트랙]]에 75mm 포를 올린 구형 M3 GMC가 전력의 대부분이였던 TD 부대가 티거가 포함되었던 전차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낸 전적도 있던 탓에 당시까지의 전적으로만 보면 티거 같은 중전차는 미군의 당시 전력으로 손쉽게 대응 가능해 보였다. 이 지경이 되자 미 육군부는 그제서야 후회했다. 물론 지휘부의 장성들이 그런 보고를 받아보는 동안에도 죄 없는 전차들은 유럽 곳곳에서 격파되어 나갔다. 게다가 측면이 얇은 수직장갑이라는 것등의 약점을 노출해서 정면에서는 포탄을 튕겨버릴 각종 2선급 대전차화기에도 약점이 노출되어 파괴당했다. 캉 점령전 때만 해도 200여대의 M4 셔먼 전차가 희생되었던 영국 육군은 하루만에 131대의 M4 셔먼 전차를 잃기도 했다. 그나마 전차에 M3 90mm 주포 장착계획을 극렬히 반대했던 맥네어 장군이 아군기의 오폭으로 전사하면서 이 계획 자체를 막을 사람은 없었으나 이런 상황을 깨달았다고 갑자기 신형전차를 뽑아낼 수도 없었다. 그 이유는 멕네어 이외에도 바보같은 장성들이 쓸데없는 체면 때문에 계획 진행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던데다 미군의 항공지원 의존도가 대단히 높아서 중전차 생산계획이 늦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퍼싱이 양산체제를 급하게 갖추는 상황에서도 셔먼의 손실은 계속되어, 어떤 기갑사단 예하 전차대대는 1944년 6월부터 1945년 3월까지 9개월 동안 장비손실율 300% 이상, 즉 전차의 전선 운용 기대수명이 길어야 3개월 이내라는 충격적인 상황까지 겪었다.그러나 당장은 수적우세를 바탕으로 계속 독일군을 격파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결과, 1944년 12월 들어 처음으로 유럽 주둔 미군에 퍼싱의 선행 배치가 시작되었다. 미군은 아프리카에서 티거가 튀어나오기 전에도 76.2mm 주포를 탑재한 셔먼을 테스트[* 다만 약간 의미가 다른데, 미군이 원한건 3인치 대공포를 경량화하여 전차포로 만드는 것이였지 셔먼에 장착하기 위한 실험이 아니였다. 당시 미군은 포탑이 셔먼과 M6, 울버린 밖에 없었는데 이미 M6와 M10은 3인치포가 그대로 들어갈 큰 포탑을 가지고 있어서 실험의 의미가 없으니 셔먼에 한 것이다. 실제로 완성하고 셔먼에 달지 않고 헬캣과 T20에 달았다.] 할 만큼 강력한 주포와 관통력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90mm 주포를 탑제한 [[M36 GMC]]의 활약상과 평판을 비롯, 90mm 주포를 장착한 퍼싱을 서둘러 배치하고자 하였으나, 발목을 잡은 건 퍼싱의 결함과 퍼싱 생산까지 버텨줄 90mm 전차의 부재이지 퍼싱의 조기배치를 미룬 것이 미군 수뇌부의 오판이 아니다. 독일의 [[5호 전차 판터|판터]]를 예로 들면, 결함을 싸그리 무시하고 쿠르스크 전투 시기에 맞춰 무리하게 생산한 결과 엄청난 수의 비전투 손실이 일어났다. 적국이 점령한 유럽을 가로질러 공세를 펼쳐야 하는 미군의 입장에서 이런 구동부 결함은 사실 심각한 리스크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결함에도 불구하고 당장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중전차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퍼싱이 필요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어 여러 관점으로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